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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굴레차 _ 치크

오랜만에 데이트약속이 잡혔다. 건의 스케줄이야 늘 비슷했으니 시간이 난 쪽은 여자 쪽이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이상하게 바빠진 여자 덕에 문자는커녕 잠깐의 전화로 목소리 듣기도 힘들어져 건의 입이 댓 발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시간 되니 건아? 하고 묻는 문자에 답지 않게 '시간이 없는 건 너잖아.' 라고 혼자 툭 투덜거리기까지 했으니 건의 불만이 어지간히도 낭낭히 차오른 때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에는 장사가 없어서 여자의 데이트 제안을 건은 두말없이 허락했다. 냉큼 떨어지는 허락에 휴대전화 너머 여자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본, 여자의 미안해하는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라 눈앞을 선명하게 지나가는 것도 굳이 막지 않는다. 이번에는 여자가 미안해 할 만 하다. 도대체가 연락이 좀 안됐어야지. 건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가 꺼낸 날짜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겨놓은 날이었다. 그럼 크리스마스도 함께 지내는 걸까 갑자기 솔깃해진 건이 이제 한동안 여유가 나느냐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하루,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는 여자의 말에 건이 또 괜히 말을 비틀었다.

 

" 그럴 거면 차라리 크리스마스에 날을 잡던지."

 

어린애 같은 투정이라는 것을 건 스스로도 잘 알고는 있었다. 수화기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고, 몇 번이나 들었던 여자의 레퍼토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건아. 아까부터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말 뿐이다. 물론 당연히 저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적당히 점심 너머 저녁 즈음해서 만나려냐는 여자의 말에 건이 펄쩍 뛴 덕분에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10시였다. 건의 욕심 같아서는 좀 더 이른 시간에 만나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거리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제가 사는 곳까지 와야 하는 여자가 피곤한 것도 싫었기 때문에 최대한 고르고 골라 건 스스로와 타협한 시간이었다. 가볍게 영화나 보고 점심을 먹으면 딱 좋을 시간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휴대전화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영화보고 점심 먹으면 딱 되겠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구태여 막지는 않았다.

 

 

보패안경까지 꼭꼭 챙겨 쓰고 따뜻한 외투에 목도리까지 둘러매고 나온 건이었지만 손은 무방비했다. 찬바람에 발갛게 얼어가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빼는 게 고작으로, 장갑을 낄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참 하고 있는 게임도 게임이지만 여자와 주고받는 톡 때문이었다. 버스에 앉아 톡을 주고받는 중인 여자는 건이 어디 근처 건물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초조해져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던 건은 차라리 정류장에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었다. 꼭 첫 데이트 때 마냥 유난을 떠는 심장에 건은 다시금 속으로 여자를 가볍게 탓했다. 이게 다 최근에 데이트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텀이 너무 길어져서 제 심장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되도 않는 이유를 들어가며 탓하는 내내 씩 올라간 입 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여자와의 대화 사이사이, 발갛게 얼어붙은 손으로 돌리던 게임 화면에 작게 메시지가 떴다.

'금방 도착 할 것 같아.'

메시지를 읽은 건이 게임을 끄고 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떨리는 마음에 크게 심호흡도 했다. 첫 데이트 때보다도 더 떨리는 것 같다.

 

여자의 말대로 여자가 탄 버스는 금방 정류장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건을 보고 활짝 웃으며 폴짝폴짝 뛰듯 버스에서 내려오는 여자를 건의 눈이 쭉 훑어냈다. 도톰한 털실로 짠 긴 목도리. 두툼하고 루즈한 핏의 니트 카디건. 카디건 안쪽의 니트 티. 스키니 핏의 바지는 제가 사 주었던 기모바지였고 신발도 굽은 있지만 어쨌든 운동화였다. 저 정도면 일단은 합격이다. 지난겨울 옷을 얇게 입고 다니던 여자를 닦달 하고 끈덕지게 굴며 옷 선물까지 했던 보람이 있었다.

속으로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의 손을 잡아낸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건아, 너 손이 얼음장이야! 많이 기다렸어? 저와 눈을 맞추기 위해 들어 올린 걱정 가득한 얼굴도, 온전히 저만 담긴 눈동자도 모두 건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잡아 내리느라 건은 큼큼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뭐, 쫌. 심드렁하게 대답하긴 했어도 여자의 관심이 싫을 리가 없었다.

 

"어디 들어가 있지. 장갑이라도 끼던가. 우리 건이 예쁜 손 다 망가지겠네."

"남자한테 예쁜 손이 뭐냐, 예쁜 손이."

 

건이 혀를 차며 나무라도 여자는 일절 신경 쓰는 기색 없이 건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호호 입김까지 불어줬다. 따끈하게 히터가 나오던 차에서 막 내린 탓에 기분 좋게 달궈진 여자의 체온이 서늘한 제 손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어릴 적부터 수련을 하던 손이니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혀있어 예쁘다는 말이 나올 수는 없는 손이었는데도 여자는 종종 건의 손을 그렇게 칭했다. 예쁜 손. 사랑스러운 손. 어자의 말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 손을 녹여주는 여자를 잠시간 내려 보던 건의 눈에 금세 발개진 여자의 뺨이 보였다. 코 끝이나 눈 주변도 발개지는 걸로 보니 그새 추워진 모양이었다. 여자의 행동이 아무리 기분 좋아도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감기에 걸리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건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숙여 여자와 이마를 마주 댔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

 

다정하게 속삭이는 건의 말에 여자가 잘게 웃어냈다. 오랜만이야. 그렇게 대꾸하며 자연스레 제 허리에 팔을 둘러내는 여자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여자가 사랑스럽다고 해서 추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얼른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하기 시작한 건은 여자와 잡은 일정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표는 건이 미리 예매해 두었고 영화 시간도 바로였으므로 그냥 들어가면 됐지만 여자는 조그만 팝콘을 부득불 사 들었다. 영화 끝나고 바로 점심 먹으러 갈게 아니냐는 건의 물음에, 동그랗게 뜬 천진한 눈으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입이 심심해."

"너 이따 밥 남기지 마."

 

원채 입이 짧은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건이 여자의 뺨을 조물조물 만져대며 짐짓 톡 쏘아내면 여자는 또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썩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팝콘에 매끈하게 코팅된 캐러멜 시럽이 입 안에서 녹을 때마다 건은 괜히 한 번 더 혀를 굴렸다. 특별히 단걸 못 먹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호하는 편도 아니다. 캐러멜 맛과 오리지널이 적당히 섞여있는 팝콘이었지만 그건 곧 입 안에 들어오는 팝콘의 절반은 달달한 코팅이 되어있는 팝콘이란 뜻이었다. 처음 몇 번이야 단 맛에 먹어도 영화 중반쯤 오자 입 안이 영 텁텁했다.

제 옆에 앉은 여자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커다란 스크린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팝콘 통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입으로 향하던 손도 어느 순간 딱 멈춰있는 게 어지간히도 몰입한 모양이었다. 액션 씬도 지나가고 한참 감정 선의 진행 중이라 더 그런 듯 했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의 손을 잡았다. 아까부터 뭐라고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이제야 마음이 맞은 모양이다. 부드럽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져가는 것까지 힐끗 확인한 건은 팝콘 통 위에 반쯤 걸쳐진 여자의 손등을 톡톡 건드려냈다.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게 무색하게 여자는 금방 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건아? 하고 묻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사랑스럽다. 그러면서도 다음 장면을 놓칠까봐 힐끗힐끗 스크린을 곁눈질하는 모습도 귀엽다.

건이 씩 입 꼬리를 올려 의미심장하게 웃어내면 여자는 건이 의도 한 대로 언젠가의 영화관을 떠올렸는지 돌연 얼굴을 붉혀냈다. 안 돼, 건아.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하고 장난스레 물으면 이젠 표정까지 곤혹스럽게 변해서 도르륵 도르륵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기까지 한다.

큭큭큭 작게 웃으며 건은 팝콘 통 위에 걸쳐진 여자의 손에 제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 연신 팝콘을 집어먹어 손가락 끝이 조금 끈적거린다. 그대로 고개를 조금 숙이며 여자의 손을 제 입가에 가져간 건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쪽쪽 입을 맞췄다. 손가락에서 캐러멜 단 내가 폴폴 올라와서 건은 속으로 조금 웃어냈다. 따끈한 온도가 딱 좋았다.

건이 손가락마다 입을 맞춰내는 행동에 영 안절부절 못하던 여자도 곧 적응했는지 건은 내버려 둔 채로 다시 영화에 집중했기 때문에 건은 건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만족스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재밌었어. 영화관을 나오며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표정이 무척 만족스러워보여서 건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도 좋았어. 여자가 건을 동그랗게 말간 눈으로 올려보았다. 어느 쪽을 지칭하는지 영 가늠하지 못하는 미심쩍은 눈치였다.

 

영화가 끝나고 점심은 건이 좋아하는 대로 고기를 썰기로 했다. 영화관 근처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가 제 양껏 메뉴를 시킨 건이 여자를 보면, 여자는 의외로 밍기적 거리는 일 없이 제대로 메뉴를 시켰다. 그것도 스테이크. 괜찮겠느냐 건이 한번 물었으나 여자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로 끝까지 다 먹은 뒤에 디저트까지 시켜냈다. 생 딸기와 키위가 층에 박힌 조그만 컵 크기의 바닐라아이스크림 위에는 멋들어지게 초콜릿 시럽과 시리얼 과자까지 뿌려져있었다.

힘들어 하는 기색 없이 입에 쏙쏙 떠 넣는 여자를 보며 건이 저도 한입 입에 물었다. 혀끝에 닿자마자 시원하게 녹아내리는 바닐라는 역시 달다. 그래도 생과일이 씹혀 느끼하지는 않은 게 잘 만들어진 디저트였다.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이상하게 잘 먹는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아이스크림을 벌써 반쯤 해치운 여자를 가만히 구경하며 피식피식 소리 없이 웃던 건이 돌연 입 꼬리를 씩 올려냈다. 장난거리가 생각나면 어김없이 짓던 개구진 표정이었다. 가만가만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골라낸 건이 이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냈다.

 

"내 애야?"

"뭐?"

 

뜬금없는 건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 건을 바라보았다. 입술 끝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살짝 묻어있는 게 어지간히도 정신없이 입에 넣고 있던 모양이었다. 정말로 제대로 듣지 못해 묻는 것인지 두 눈에 의아함이 가득해서 건은 다시 씩 웃으며 입을 놀렸다. 손가락으로 여자를 살짝 가리키기도 했다

 

"내 애냐구. 고기 먹는 기세가 딱 나였는데."

 

그제야 건의 말을 이해한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살짝 발개진 얼굴로 웃으며 한참을 웃은 여자가 혀로 제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훔쳐냈다.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감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걱정돼서?"

"어? 진짜야? 우리 누나 밥 잘 먹는 게 예뻐서 그랬는데 진짜 내 애냐?"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묻는 여자의 말에 능청스럽게 대꾸한 건이 실실 웃으며, 여자가 방금 훔쳐내 깨끗한 여자의 입술을 괜히 한번 엄지손가락으로 훑어냈다. 그리곤 제 행동에 제가 괜히 부끄러워져, 묻힌 것도 모르고 먹을 정도 길래 우리누나가 맞나 싶었지. 괜히 몇 마디 더 붙여내면 여자가 한숨 비슷한 걸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요 며칠 좀 굶다시피 해서 그래."

"잘 먹고 다니라니까."

 

평소에도 씹는 게 아프고 힘들고 귀찮다며 적당히 먹거나 부드러운 걸 찾아 먹는 여자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굶기까지 했다니 조금 화도 난다. 여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일이 고되어 그런 걸 테지만, 여자에게 일이 몰리는 것도 영 마뜩잖았다. 원체 약한 사람인데 얼마나 혹사를 시켰으면 잘 먹지도 않던 밥을 이렇게 먹을까 싶다. 물론 잘 먹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평소에 특별히 제 앞에서 일 투정을 하거나 하지 않는 여자였는데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소소하게 푸념을 했다. 이 사람이 어쨌다던가, 밥시간이 너무 안 났다던가, 일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던가.

턱을 괸 채로 여자의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여자의 푸념을 들어주고 간간이 호응해주고 맞장구까지 치며 훌륭한 청자의 자세를 보여준 건은, 이내 조금 후련해 진 것 같은 여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누나 고생했네. 그래도 밥 잘 먹는 건 보기 좋다. 다정한 건의 말에 여자가 실없이 웃어보였다.

식사도 천천히 했거니와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나니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지는 탓도 있어서 여간 쌀쌀한 게 아니었다. 여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 단단히 동여매준 건이 여자의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쑥 넣었다. 정류장 까지는 이렇게 가자는 건의 귀 끝이 발그스름했다.

 

어둡기는 해도 아직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다른 커플들이면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을 시간이었지만 건과 여자는 떡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버스를 타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으니 지금쯤 떠나야 너무 늦지 않게 여자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란도란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걸으면 정류장은 금방으로, 아직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차 시간을 확인한 건이 제 주머니에서 쨘! 입으로 소리를 내며 스틱형의 립밤을 꺼내들었다. 저게 무슨 뜻인지 아는 여자가 주변을 쓱 훑고는 조금 웃었다. 하여간 저 어린 것은 의외로 철두철미하다.

얌전히 제 앞으로 쪼르르 걸어온 여자를 만족스럽게 내려 본 건이 한 손으로 여자의 턱을 잡아 올려 고정시키고 다른 손으로 입술 구석구석 립밤을 발라주었다. 겨울이면 입술이 꼭 부르트는 여자를 위해 작년 겨울부터 건이 자주 하던 행위였다. 이제는 익숙하게 얼굴을 맡기고 건이 바르기 쉽게 입도 살짝 벌려준 여자는 마지막으로 눈을 내려감았다.

건의 얼굴이 떨어져 입술끼리 마주하고 나면 잠시간 붙어있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처음엔 밖에서 하는 스킨십을 부끄러워하는 여자에게 맞춰 입술을 챙기지 않은 벌이라며 하던 장난이었지만 이제는 추운 날, 헤어지기 전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 건의 입술이 유난히 뜨거웠다. 누구의 입술이라고 할 것 없이 과일향이 났다.

 

헤어질 때면 늘 뾰로통하던 건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해 보이는 것 같아서 여자는 두 눈을 깜박였다. 나른하다. 움직이기도 싫고 건과 떨어지기도 싫다. 사실 돌아가면 또 일을 해야 한다는 거부감도 조금 있었다. 해서, 여자는 가만 가만 제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았던 투정을 부렸다. 꼭 누구 들으라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들을 사람은 정해져있었다.

 

"집에 가기 싫다~. 건이랑 중앙에서 자고 싶어."

 

건은 지금 저 말이 그래도 된다는 말인지 그냥 하는 투정인지 분간하느라 분주했다. 좀처럼 저런 투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더 그랬다. 말갛게 눈만 깜박이던 여자가 건의 팔에 팔짱을 끼어오면, 그제야 건이 못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은근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돼?

 

"내일 아침 일찍 가지 뭐. 할머니나 애들이 안 된다고 하면 별 수 없고."

"잠깐 기다려봐. 금방 물어볼게. 야, 안된다고 하면 내가 외박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드는 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나 다른 아이들이 여자가 하루 묵고 가는 일을 기꺼이 허락해주었다. 까다롭기로는 제일가는 가람이도 선뜻 허락해주고 황송하게도 저녁때까지 들어오느냐 물어 주었다. 가람의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여자는 건이 들고 있는 휴대폰을 향해, 정확히는 보이지도 않을 휴대폰 너머 가람이를 향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가람아! 사랑해! 여자가 감격에 겨워 그렇게 외치면 전화통화를 하던 건이 눈을 세모꼴로 부라렸다. 입. 그 입. 또 함부로 놀리지. 여자의 입을 장난스럽게 잡아내는 건의 손길이 퍽 매서웠다.

 

뭐라도 사들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고 말은 해 두었지만 주변을 살피는 여자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를테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의 눈빛이 딱 저렇겠지 싶다. 연신 휴대폰을 뒤적이고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과 저곳을 비교하는 것처럼 고뇌를 했다. 일련의 동작이 독백의 일인극을 보는 것 같아 건은 잠시 팔짱을 끼고 여자를 잠자코 구경했다. 앙다문 입과 반쯤 내려 깐 그윽한 눈으로 열중하고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 사실 여자의 어떤 모습이어도 좋았지만 지금은 저 조용한 모습이 좋았다.

좋아, 가자.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여자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여자의 요청에 따라 건은 유리 너머에 얌전히 자리한 달콤한 녀석들을 응시했다. 한 쪽은 하얀 생크림 위에 살포시 앉은 딸기, 한 쪽은 부드럽게 달콤한 초콜릿이었다. 고기 이외의 것에는 크게 호불호가 나뉘지 않는 건에게는 꽤 어려운 문제다. 단걸 즐기지 않으니 더 고역이었다. 제 옆에서 도륵도륵 눈을 굴리며 양쪽을 비교하고 있는 여자는 다른 의미로 고민 중일 테니 도움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근 1년간 함께한 여자는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지독히도 우유부단한 사람이니 지금처럼 모두 마음에 드는 상황에서는 쉽게 무얼 취하고 떨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서, 지금 건의 결정은 매우 중요했다.

건이 톡, 검지 끝으로 유리를 건드렸다. 이걸로 해. 건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새하얀 생크림과 큼직한 딸기다. 여자는 건의 얼굴을 한번, 손가락을 한번, 쇼 케이스 너머 딸기케이크를 한번 차례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은 여자의 표정이 돌연 단호해졌다. 분명, 정말 이게 괜찮은가? 로 시작된 뫼비우스의 띠에서 겨우 제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건은 일사분란하게 직원을 불러 포장까지 주문했다. 케이크가게에 들어 온지 30분 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이 중앙에 들어왔을 즈음 가람이 식사준비를 끝마쳤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식탁에 둘러앉는 모습이 가족처럼 자연스러웠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자연히 여자와 건이 사온 케이크를 디저트 삼았다. 앞 접시와 포크를 준비해오는 가람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담겨있었다. 가람이 단걸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여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몇 번인가 같이 단 것을 먹었고 괜찮은 제과점 위치를 공유한 적도 있었다. 하루 종일 단걸 먹어 물린다며 손을 내저은 건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적당히 한 덩이씩을 내어주고도 요령 좋게 케이크를 절반이나 남겨둔 가람이 여자에게로 포크를 쑥 내밀었다. 그건 곧 같이 먹자는 소리였으므로 여자는 황송해하며 포크를 건네받았다. 뒤에서 건이 눈을 흘기는지 등짝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지만 그것도 곧 입 안에 달고 부드러운 게 들어온 이후로는 잦아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행복해.

헤실헤실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여자는 정말로 행복해보여서 건이 조금 헛웃었다. 저녁도 잘 먹었는데 케이크 4분의 1을 말끔히 해치우다니 이제 슬슬 걱정까지 되는 참이었다. 그간 굶었다거나 오늘 아침도 굶었다든가 모든 이해의 범위와 경우의 수를 다 대입해도 오늘 먹은 양은 여자가 평소 먹는 양의 세배 네 배는 족히 되는 양이었으니 걱정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잘 먹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건은 답지 않게 몇 번인가 주저한 끝에 여자의 손을 잡아냈다.

너 배 괜찮아? 여자를 내려 보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못해 세심하게 얼굴을 살피는 눈길이 꼭 눈앞의 여자가 진짜 제가 아는 그 여자가 맞는지 확인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혹여 여자로 둔갑한 신령 같은 것이라면 당장에 주먹을 날릴 준비가 기꺼이 되어있는 것처럼 얼굴이 결연해보이기까지 해서, 건이 깔아준 이불 위에서 기분 좋게 누워있던 여자의 눈썹이 팔자로 떨어졌다. 왜? 나 그렇게 많이 먹었어? 전혀 기억에 없다는 어조에 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워내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건의 대답에 정말로 기억이 나질 않는 듯, 그랬나? 같은 말이나 뱉던 여자가 돌연 몸을 뒤집어내 무릎을 꿇고 앉아 건과 다시 눈을 맞췄다. 건과 돌아다녔던 게 어지간히도 좋았는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이었다.

 

"그럼 건이는 오늘 먹은 것 중에 뭐가 제일 달았어?"

 

나 피곤해서 그런지 느껴지는 맛이 좀 약하더라. 하고 덧붙여내는 여자의 물음에 건은 선뜻 입을 열었다.

 

"제일 마지막에 먹은 거."

"케이크? 그 케이크 집 부드럽고 괜찮더라! 근데 달기도 했어?"

"난 그거 입도 안 댔거든?"

 

툴툴거리며 대꾸하는 건의 말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그랬지. 하고 이제야 기억난다는 듯 말하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가람과 찰싹 들러붙어 코를 박고 정신없이 입에 넣는다 했더니 제 남자친구는 정말로 홀랑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얄궂은 마음에 여자의 뺨을 가볍게 쥐었던 건이 이내 제 머리를 내려 여자의 입술을 찾았다. 처음에는 죽도록 부끄러웠던 스킨십도 이제는 익숙했다.

 

"나는 이게 제일 달더라."

 

여자는 멍하니 뺨을 붉혔다가 이내 맥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 덩치 큰 게 이렇게 애교를 부리니 힘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사랑스러운 마음을 두 눈에 가득 담아 건의 양 뺨을 잡아내면, 건은 자연히 눈을 감아냈다. 오늘의 마지막 디저트를 먹여줄 시간이었다.

 

 

여담.

 

조그맣게 들리는 끙끙 앓는 소리에 건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꿈결에 들은 소린가 했는데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앓는 소리도 더 선명해진다. 새벽의 서늘함과는 본질에서 다른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덮쳐 불에 덴 듯 눈을 뜬 건이 제 품 속을 확인하고는 숨을 삼켜냈다. 자기 전 까지만 해도 말짱하게 키스했던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이마에는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야..!"

"건아..."

 

살살 흔들며 여자를 부르면 여자는 일어나 있었던 건지 금방 눈꺼풀을 들어 올려 건을 올려다봤다. 그새 핼쑥해진 얼굴에 건이 여자의 뺨을 쓸어낸다. 갑자기 왜 그래? 하고 묻는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울렁거려....배 아파..."

"...내가 너 어제 그렇게 입에 뭐 넣을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그래도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는 살아있는지 여자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냈다. 죄송합니다. 하고 흐물흐물한 목소리로 사과까지 한다. 자상하게 여자의 용태를 묻고 찬 물을 떠와 한 모금 먹이기까지 한 건이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했다.

 

"약 사올게."

 

이불속에서 끙끙대는 여자를 뒤로하고 하품을 하며 집을 나선 건이 쌀쌀한 날씨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간밤에 여자를 보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여자 혼자 제 집에서 끙끙 앓았을 터다. 아픈 몸으로 일을 나가겠다고 무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불 속에 눕혀 놔야지. 그렇게 마음먹자 걱정되는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아진 건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비탈길을 빠르게 내려갔다. 어쨌든 오늘 하루는 온종일 여자와 함께였다.

with. 백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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